레모니스니켓의 위험한 대결(2005)_실험상자 속에 든 쥐같은 3남매 신세...실험은 종료? ── 영화

2005/1/27/CGV 목동

셋트를 정말 공들여 만든 것 같은데 구경조차 제대로 안시켜 주고 끝나버린다. 게다가 속편은 물건너 간거인가. 
분명 엔딩은 속편이 있을 것 같았는데 아직도 감감 무소식인 걸 보면 참 찜찜하다.

스캐일이 큰 블록버스터 느낌이 나고 캐릭터들도 독특해서 좋았지만 너무 많은 내용을 다루려고 했나, 아니면 이야기의 구성이 효율적이지 않았던 것일까. 원작은 분명 탄탄한 스토리일텐데 영화에서는 사건들이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고 단순히 시간 순서에 따라 듬성듬성 사건을 나열해놓은 것 같다.
그런데 또 엉망으로 건성 만들었다는 괴씸함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은 아니었고,
짐캐리와 메릴스트립, 그리고 귀여운 꼬맹이 캐릭터들이 다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조금은 허전하다.

그래도 아이들의 성장과정에서 꼭 보여주고픈 작품이긴 하다.
일단 볼거리가 풍부하니까, 이건 어른의 눈높이에서인지 모르겠지만...몽티 아저씨의 동물원같은 집과 검푸른 무서운 바다위에 위태롭게 놓인 조세핀 숙모의 신경질적인 집만 해도 어디야. 

나쁜 놈은 너무 센데 멍청하거나 착한 사람은 나쁜 놈을 못알아 보고,
어쩌다 나쁜 놈을 제대로 알아보는 현명한 사람은 힘이 없다
울라프 백작으로 변신한 짐캐리야 뭐 말할 필요도 없고,
편집증 결벽증이지만 자애로운 숙모 매릴 스트립의 연기도 뭐 두말하면 잔소리고,

보들레어가의 3남매 아이들이 너무 귀여웠다.
처음에는 어디서 저런 못난이들을 데려다가 영화를 찍었나 생각했는데 볼수록 볼매였다.
발명이 특기인 맥가이버같은 첫째 바이올렛(에밀리 브라우닝)은 어딘지 조정린 님의 분위기가 나서 보는 내내 괜히 얼굴만 봐도 웃음이 났고
책읽기를 좋아하면서 읽은 내용을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는 기억력과 상식과 논리적 추리력이 풍부한 클라우스(리암 에이켄)는 유희열님 어린시절이라고 하면 딱 어울릴 듯한 가녀리면서 유약해보이면서 지적인 소년이다.
그리고 셋째는 언니나 오빠 품에 안겨있는 모습 자체가 귀요미였다. 처음엔 역시 못생겼다고 생각했는데 거추장스러운 드레스를 입고 그렇게 도도하게 옹알이를 하는 게 꽉 깨물어주고 싶었다. 어린 아기가 힘들다고 쌍둥이 자매를 번갈아 촬영토록 했다니 미국의 인권에 대한 인식이 좋긴 좋구나.

그런데 내용은 선악의 대립이 뚜렷한 명쾌한 구도이고, 돈을 많이 들인 듯 볼거리도 많고, 가슴 졸이는 스릴과 시원하게 부서지는 파괴적 액션도 있고 내가 좋아하는 요소들이 가득한데 3남매가 너무 고초를 겪어서 양심에 찔린다.
구세주처럼 나타난 울라프를 믿었는데 나쁜놈이고, 
공동 후견인이자  유산집행인인 포 아저씨를 필두로 해서 울라프가 나쁜 사람이라는 걸 믿어주는 사람이 없고, 
조세핀 숙모나 몽티 삼촌과 같은 착한 보호자는 자기들을 사랑으로 보듬어주었다는 이유로 위험에 처하게 되고. 
울라프가 위험하고 나쁜 사람임을 감지하는 똑똑한 조세핀 숙모는 3남매를 지켜줄 능력이 없다.
사방에 믿을 구석이라곤 하나 없고 오로지 셋이서 헤쳐나가는 수밖에 없는 암울한 현실.

그야말로 부모 잃고 집도 잃고 불길한 기운을 몰고 다니는 신세다.
그런데 셋이 똘똘 뭉쳐 다니며 위기를 해결해나가는 걸 보면 안쓰럽긴 해도 재미있고,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본능을 발휘하고 절망 속에서도 헤어날 구멍을 찾는 집념을 보면 희망이 느껴진다.

세상엔 나쁜 일도 있고, 희망이 없는 일도 있다고. 
작가인 레모니스니켓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라고 하는데
계속 나쁘고 계속 희망이 없더라도...죽지만 않고 살아 있으면 
비록 희망을 만나게 되지는 못하더라도 그냥 그렇게 생존하려는 노력 자체가 의미있는 거라는 가르침을 주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나 역시 좀 너무한 삼촌들을 둔 조카의 한 명으로서 삼남매의 일이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조선왕조 500년을 살펴 보아도 왕이나 왕자가 어려움에 처하거나 든든한 울타리에서 벗어나면 먼 곳의 사람이 헤치러 오는 것이 아니라 그를 앞장서서 지켜주어야 할 삼촌들이 들고 일어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오히려 외삼촌들은 별로 안그런 것 같은데, 친삼촌들은...이건 남매와 형제 사이의 다른 점이기도 한것일까.
남동생이 있는 나는 남동생의 자식들에게도 헌신할 수 있을 것만 같은데, 그건 내게 여동생이 있더라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하지만 내가 남자이고 형이나 남동생이 있다고 가정을 한다면...그건 도저히 알 수 없는 문제겠지만 신화같은 곳에 많이 등장하는 형제간의 경쟁심리나 적개시 비스무리한 무언가일지도. 
아, 물론 울라프는 겁나 먼 친척이라 소개될 뿐 3남매의 엄마 아빠 중 누구와 어떻게 관련이 있는지 모르지만.

원작을 잠깐, 중간중간 읽어보다가 말았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것 아닌가 덜컥 겁이나서 그만 두었다. 기회가 되면 부모님이 남겨주신 편지의 전문을 꼭 찾아보고 싶다.

"세상에는 나쁜 사람도 많지만, 그 만큼 좋은 사람도 많으니 실망하지 마라.
항상 나쁜 사람과 좋은 사람을 알아보는 눈을 길러야 한다."
대강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은데.
못된 울라프와 그런 울라프를 절대 못알아보는(혹은 못알아보는 척하는?) 주위 어른들 때문에 갖은 고초를 다하는 과정에서 3남매는 분명 더 강해지겠지. 그래서 그리 슬프고 절망적이지만은 않다.
...그런데 그렇게 아이답지 않게 강해져야만 하는 보들레어가의 남매들이 또 불쌍해지고.
이거 뭔 무한반복인지.

쥐 실험 중에 이런 게 있었던 거 같다. 버튼이 있는 감옥(?)안에 갑갑하게 가두어두면 쥐가 폴짝폴짝 뛰어 버튼을 눌러본다. 모양이 다른 버튼을 바꿔 넣어주면 계속 도전을 하다가 아무리눌러도 변화가 없으면 나중에는 새로운 버튼이 들어오든지 말든지 쳐다보지도 않는...포기와 절망 상태가 되는. 마침내 인간이 진짜 탈출 버튼을 넣어주어도 누르려는 노력을 하지 않게 되는. 

이 3남매가 내게 어떻게 해야되느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얘기해줘야할지 도무지 모르겠고 복잡우울해질 것 같다.
그러니까 난 그냥 이 영화가 재미있었다고만 기억할테다.

그리고 주드로, 목소리와 그림자만 나오긴 했지만 반가웠다. 역시나 2005-6년도 헐리우드 영화 이곳저곳에 안 낀 곳이 없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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