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하루(2008)_될 성부른 찌질남의 치명적인 매력 ── 영화

멋진 하루(2008)/이윤기 감독/전도연 하정우 주연
2011.2.12.시네마테크 관람

개봉된 지 한참 지나서 극장에서 볼 기회가 있어 보게 되었다. 왜 못봤었는지 후회될 정도로 재미있게 봤다.
이렇게 잔잔한 멜로 영화, 특히 한국 멜로 영화를 많이 본 편이 아닌데...기억에 남는 게 봄날은 간다, 와니와 준하, 동감 뭐 그런 정도.
멜로 중에 순위권에 당당히 입성한 영화다. 이렇게 스킨십 한 번 안나오는 작품들이 나에겐 더 현실적으로 와닿아서 그런지 몰라도 연애감정 둔하기로 소문난 나인데 희수 마음이 어떤 건지 다 느껴졌다. 그게 너무 신기했다.

로맨틱 코메디도 아닌 것이, 실상 두 주인공이 처한 상황을 비춰보면 시궁창 그 자체라 한숨이 나와야 하는 게 정상인데 옛 연인이 함께 보내는 하루에 설레임이 느껴지면서도 과연 돈을 다 모을지 어떨지 스릴까지 넘치는 작품이다. 일본 작가의 원작을 각색한 영화라는데 그래도 감독님의 실력이 출중하셔서 이렇게 잘 만들어지지 않았나 싶다.

희수(전도연)와 병운(하정우)이는 사귀다 헤어진 사이다. 희수는 '사'자 붙은 신랑감과 결혼을 앞두고 파혼한 상태이고 실직까지 해서 연락하기 껄끄러운 병운에게 '빌려준 돈'(08년 개봉 당시 300만원 정도)을 받겠다며 찾아갈 정도로 뭔가 감정의 코너에 몰린 상태의 여자다.
병운이는 그 사이에 짧은 결혼 생활을 했었고 지금은 이혼해서 집도 절도 없이 짐가방 하나 들고 경마장을 전전하며 떠도는 신세다.

영화가 다 끝나고 보니 희수가 과연 빌려준 돈이 아쉬워 병운이를 찾았던 건지도 의문이다. 그보다는 짜증받이가 되어줄 만만한 사람 대용으로 병운이를 찾지 않았을까도 싶고...
이 둘은 병운이가 갚아야 할 액수만큼 돈을 빌리러 함께 다녔던 '멋진 하루' 이후에 다시 잘 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안나온다.
내가 희수라면 정말 힘든 고민일 것 같다. '사'자 붙은 남자와 결혼을 하려했을 정도로 현실적인 감각이 없지 아니한데 -_-;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현실을 극복해볼까 고민하게 할 정도로 병운이라는 캐릭터가 너무나도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찌질남인데 매력남인 병운, 혹시 흥선 대원군 코스프레?
병운이로 말할 것 같으면 허우대는 멀쩡한데 변변한 직업도 없고 모아 놓은 돈도 없고 그야말로 대책없는 한량이다. 가진 것 하나 없이 '스페인의 막걸리집' 타령이나 하며 뜬구름 잡는, 한숨나오는 조건의 남자인데 다른 한 편으로는 사막에 혼자 떨어져도 어떻게든 즐겁게! 잘 먹고 잘 살 것 같은 서글서글함과 능구렁이같은 처세술이 여자 입장에서 뭔가 든든함을 느끼게 한다는 게 함정.
이 남자는 여느 남자와 다르게 돈 갚으라며 찾아온 옛 연인에게 자격지심에서 우러나오는 짜증도, 비굴함도, 과도한 미안함도, 오리발도 없었다. 그리고 어떤 여자도 예상치 못할 반응을 보인다. 지금 당장은 갚을 돈이 없다고, 나중에 갚겠다는 것도 아니고 돈을 빌리러 함께 다녀보자고, 오늘 안에 빌려보자고 대뜸 길을 나선 것이다.
그런 병운이를 따라 나선 희수도 스크린 밖의 사람 입장에서 보자면 정말 미친 거나 다름없지만, 돈보다도 병운이 너무 어이없고 궁금해서 귀찮음 따윈 잠시 잊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런 선택 때문에 하루 동안 병운이의 매력에 더 빠지고 정들어 버린 것 같다. 아마 이혼남 병운이랑 다시 시작한다면 파혼과 실직에서 비롯된 앙칼진 성품을 고칠 수 있을 것 같다고 수없이 고민을 할 거다.
경제적 생존 문제와 정신적 생존 문제 사이에서의 고민이랄까. 푸흣.

여튼 스크린 밖 관객의 눈으로 본 병운이라는 저 남자, 의외로 돈 좀 빌릴 구석이 많은가 보라고 생각하던 찰나 돈 많은 중년부인과 몸으로 돈을 버는 미모의 술집 여인, 자길 좋아하다가 애정 없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여인 등 여자들만 줄줄이 몇을 찾아가는 거니. 사촌 형한테는 홀대받고. 게다가 한 번에 큰 금액을 빌릴 정도의 인맥은 아닌 모양인지라 몇 십 만원씩 찔끔찔끔 모은다. 돈 빌려주는 여인들 입장에선 병운이가 이야기 친구 정도인 것 같았다. 한량인 듯 보여도 그렇게 가볍게 놀지 않은 것 같은, 모두들 입을 모아 좋은 사람이라고 칭찬해줄 정도로 진심어린 대인관계를 만들어 왔던 멋진 남자인 것 같았다.
누구에게나 그닥 환영을 받지도, 그닥 홀대를 받지도 않는 편안한 사람. 이혼을 하고 혼자 아이를 키우며 어렵게 살아가는 가운데에도 그가 필요하다니 돈을 긁어 내어주는 여자까지.
대체 어디서 어떻게 그런 인맥들을 만든 것인지 신비롭다. 아마도 그 오지랖과 반죽 좋은 성품이 작은 만남과 인연의 끈을 그렇게 키운 듯 한데.

상호보완적인 멘탈 상태, 어쩌면 희수에게 오아시스가 될 남자
두 사람이 잘 어울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게 희수는 예민하고 뾰족뾰족하고 약간은 히스테릭한 느낌. 작은 돌발상황에 부딪혀도 큰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인 것 같은데
병운이는 극도로 낙천적이다. 이 없으면 잇몸으로 해결하면 된다는 주의, 짜증한 번 내지 않고 부드럽고 능글맞게 대처한다. 자기 일이 급한데 남의 일도 봐주고, 그런 다음에는 돈 빌리려는 목적도 꼭 이루는! ...뭔가 만만한 취급으로 무시당하는 것 같아 보여도 사실 상대방을 제대로 다루고 있는 대인관계 달인?
그래서 '멋진 하루'의 끝에 희수는 많이 부드러워진 모습이다. 체벌로 껌을 떼는 아이를 따라 깔끔한 성격의 그녀가 더러운 바닥에 무릎을 꿇기도 하고 나중엔 그냥 껌떼기 삼매경에 빠져서는...희수는 그렇게 따뜻하고 여린 마음을 차가움으로 위장하고 있던 여자였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잘 다루는 병운이. 객관적으로 보면 자기 신세가 더욱 한심하고 희수에게 기죽어야 하는 처지임에도 단 한 순간도 '채무자'의 느낌이 안난다. 희수의 기분을 맞춰주고 비위를 거슬리지 않으려 굽신거리지만 그녀를 자기 손바닥에 두고 좌지우지 하는 것 같다. 투정부리는 딸을 어루고 달래는 아버지처럼 그렇게. 
그 둘에게 있어 묘사되지 않은 시간들, 즉 병운이의 이혼과 희수의 파혼이라는 아픔의 시간 동안. 희수는 이혼을 열 번쯤 겪은 것만큼 아파하고 자신을 괴롭혔을 거다. 병운이도 인간이기에 분명 괴로웠겠지, 그렇지만 남자답게 절망 가운데서도 즐거움을 찾고 자신을 다잡았을 거다.
...호닥거리는 여자와 듬직한 남자라...여자로서 부끄러울 정도로 지독하게 현실적인 사실.


병운이 캐릭터가...현실 도피를 일삼는 어떤 미친 놈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영화에서 묘사된 그의 사소한 행동거지나 삶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가 왠지 큰 도약을 향해 웅크리고 있는 고수같은 느낌을 준다. 혹시 흥선대원군-_-? 그래서 매력적이다.

하정우라는 배우가 나온 영화를 본 건 지금까지 이게 유일하다. 내가 하정우의 다른 영화들을 외면하는 것은 공포틱한 장르를 싫어하기 때문이지만 어쩌면 이 영화에서의 캐릭터를 지우고 싶지 않은 건지도. 
전도연이라는 배우는 뭐 말할 것도 없겠지. 전도연이 출연하는 영화들도 내 취향이 아닌 게 많아서 많이보진 못했지만 연기로 나무라는 사람을 한 번도 못 본 듯 . 이 영화 역시 딱 희수=전도연이다. 영화가 아니라 그냥 다큐같았다. 배우의 연기력은 '나 지금 연기해요~'하는 장면들보다는 이렇게 일상적인 장면들에서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 아닌가 싶다. 새침한 깍쟁이 같은데 병운이가 하자는 대로 잘도 이끌려가는 헛똑똑이 같은 순진한, 흔한 여자를 너무나도 잘 그려냈다.

설정된 상황은 퐝당 그 자체이지만 두 사람의 연애감정만큼은 너무나도 현실적이어서 뜨끔하구나.
별 대사도 없는 희수의 마음이 그냥 느껴진다. 병운이에 대한 약간의 짜증(내가 왜 저런 놈을 좋아했었지?)과 연민(이혼하고 집도 없이 떠돈대)과 애증(나 없는 사이 그새 결혼을 했었어? 어떤 여자였길래?)과 설레임(역시 괜찮은 구석이 많은 남자야. 많은 여자들이 인간적으로 좋아하고 있어)으로 의식적으로 밀어내고 경계하고 선을 그으면서도 모질게 끊어내지는 못하는 내면의 갈등 상태가.


덧글

  • 김갱 2013/02/23 16:22 # 답글

    저는 병운이 아직도 희수를 좋아하는 것처럼 느꼈어요. 감정의 잔여가 남았던 것처럼 계속 붙잡고 있는걸로 보였거든요.
  • 레자드리아 2013/02/24 01:03 #

    저도요. 전 병운이가 희수가 첨 찾아왔을 때도 당황하면서도 올것이 왔다고 기회라고 생각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느물느물~ 자꾸 옛 이야기를 하고 추억을 상기시키고 그런 모습이 있었죠. 희수는 첨엔 그런 거에 알러지 반응을 보이다가 나중엔 두 손 드는 거 같고요 ㅋㅋ

    어쨌든 평소에 대인 관계와 자기 평판 관리를 잘 해놓지 못했더라면 급작스러운 돈 빌리기 여행을 함께 할 기회조차 잡지 못했을 거란 생각에 병운이가 더 대단하게 느껴져요.
  • 김갱 2013/02/24 09:19 #

    마지막에 사진으로 식당을 보여주는 것도 좋았어요. 아련아련하서 참 좋은 영화인 것 같아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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