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무엇일까?’
이러한 보편적이고 흔하고 진부하면서도 막상 답을 생각하자면 막막한 질문에 대해 다루는 것은 창작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다소 버겁고 위험한 것 아닐까.
사실 모든 대중 가요의 가사나 영화들은 사랑을 얘기하지만 대부분 간접적인 방식으로 의미를 전달해왔던 것 같다.
저 질문의 답을 생각해 보게 했던 영화들 중에 가장 기억이 나는 것은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 영화를 보고 ‘도대체 사랑이 뭐야?’ 라는 의문을 품게 되지만 영화에서 대놓고 생각해 보라고 하지는 않았다.
장진 감독님의 용기가 대단하다.
탄탄한 시나리오
장진 감독은 시나리오를 워낙 잘 쓰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감탄하고 또 감탄할 정도로 군더더기가 없다. 그러다 보니 키스신도 없고 모든 대사가 명대사요, 모든 장면이 명장면이다.
사실 중간중간 끼어드는 사건사고 등등이 그리 밋밋하고 가벼운 것은 아니다.
은행 강도, 살인 사건, 동네 도둑, 시한부 인생 선고 등 오히려 기상천외한 소재들의 연속이지만 별로 작위적인 느낌이 들지 않는다.
내가 너무 장진 감독에게 호의적이어서인건가?
정재영 발견!
사실 이 영화를 거의 개봉하자마자 보게 된 것은 장진 감독의 이름, 그리고 이나영 때문이었다.
정재영은 누군지도 몰랐다. 나중에 검색해본 결과 '피도 눈물도 없이', '실미도'에서 꾀 터프한 역할을 했었던 배우라고 한다.
그의 출연 영화 '귀여워'도 꼭 보고 싶었는데 이런저런 일들 때문에 못 본 게 너무 아쉽다.
여하튼 이 님을 이 영화에서 처음 접한 나로써는 전작들에서 그랬다던 마초적인 모습은 도무지 상상되지도 않을 정도로 인상이 너무 선하고, 눈이 너무 맑고, 목소리가 너무 좋고(가수 김정민과 비슷한 듯) 어투가 소년다웠다는.
그리하여 또 한 명의 이상형이 되었다. 배우의 이름만으로 영화에 호감을 가질 수 있게 된. '한석규' 보다 호감도 우위?
이나영은 청룡 영화제 여우주연상!!!
이나영은 한이연이다. 정재영은 동치성이다.
배우들의 연기가 너무 뛰어나다. 이 사람들 말고는 다른 사람들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특히 이나영은 그렇다. 이나영이 청룡 영화제 주연상 받은 것은 당연한 결과...는 아닐지 몰라도(사실 다른 후보들의 작품을 본 적이 없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고개를 갸우뚱 할만한 일은 아니다.
연기를 잘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여러가지 기준이 있지만 그 중에 하나가 그 연기자가 그 캐릭터와 동일시 되는 것이라면 누구든 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연기를 잘하고 못하고의 요소를 스크린 밖에서 찾는 경향이 있는 거 같아서 좀 씁쓸하다.
여배우가 벗는 연기를 하는 거. 대단한 결심이다. 참 힘들겠지.
추운 한겨울에 바닷물에 들어가거나 민소매 입고 여름인척 하는 거. 힘들겠지.
그렇다고 사투리를 구사하거나 1인2역을 하거나 장애인 흉내를 똑같이 내거나 시간을 초월해 나이를 몇 십 년 뛰어넘거나 비위 거슬리는 날음식을 먹거나 언성을 높여 오열하거나. 꼭 이렇게 이벤트성 짙은 연기를 해야만 오~대단하다...라고 생각하고 그게 홍보가 되고, 또 상 줄만한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청룡 영화제는 항상 가장 공정했던 것 같다.
영화의 내용
동치성의 이별
웃기다. 헤어지자고 말하는 여자에게 갖은 막말을 퍼부어 대고 미친 사람처럼 낙엽을 쓸어 담아와서 뿌려대고 치사하게 굴던 그 장면이 이 영화의 시작이다. 결국 상상이었고 실제로는 곱게 보내주었지만.
일방적으로 이별통보를 받았을 때의 남자들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하고 싶은 대로 퍼붓지 않는 그런 인내심이 대단한 거라고.
도끼 들고 절대 못 헤어진다고 매달리거나 한강에 투신하거나 약 먹고 자살한다고 협박하지 않는 그런 인내심을 가진 정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함이 당연한 거지만 그 당연함 속에 힘든 부분도 있구나, 그런 걸 느꼈다.
동치성의 시한부 선고
3개월의 여생을 선고 받는 것이 이 영화의 직접적인 발단이다.
간접적인 발단은 이연이가 이미 10년 전서부터 치성이를 몰래 좋아하고 있었다는 것 정도가 되겠다.
시한부 인생을 알게됨으로 인해서 치성이는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마시게 되고 봉투에 담겨 여관에 가게 되고 이연이의 존재를 알게 된다.
또, 남들에게는 다 있는데 자신에게는 없는 세가지도 알게 되고...첫사랑, 내년, 주사
그리고는 집을 잡혀 은행에서 거액의 융자를 받고 자포자기하며 야구시합에서 뻘짓도 하게 된다.
물론 결말 부분에 가서는 남들에게 다 있는데 치성에게는 없던 세가지를 모두 가지게 되지만.
3개월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는다면?
집담보로 은행서 돈을 빌리고 딱히 뭐 할 것이 없어 고민하던 치성이 이 질문을 이연에게 하자,
뜻밖에 3개월을 기다리느니 차라리 일찍 죽어버리겠다고 대답한다. (시나리오를 쓰신 장감독님의 자문자답에 경의를 표한다.)
이에 자극 받아 자살의 방법으로 마라톤을 택한 치성이 3등씩이나 해서 김치 냉장고를 상품으로 받는다.
죽지 않았음을 한탄하는 치성이 뒤로 식구도 없는데! 용량이 되게 크다! 면서 기뻐하는 이연이의 모습은 해피엔딩을 예고했었다.
얽힌 사건 1 은행 강도
치성이 은행에 대출 받으러 간 날 9인조 은행강도가 들이닥친다. 다른 사람들 다 쭈그릴때 치성만 뻗댄다.
3개월 시한부 인생에서 비롯된 용기로 말이다.
여기서 한가지 웃긴 것은 이 동호회의 모임이 이연이가 아르바이트하는 제과점에서 있었는데,
어쩐지 그때 이연이와 이연이 친구의 대화는 - 이연이가 봉투에 담아 치성이를 여관으로 옮겼던 날의 이야기를 친구에게 하고 있었다- 별 포커스를 받지 못하는 듯 카메라가 동호회로 옮겨져
그들이 아주 선량하고 어리버리한 모습으로 닉네임으로 자기 소개를 하고 대화를 시작하려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그들이 나중에 치성이와 은행에서 마주치게 될 강도들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아주 둔한 사람은 아직도 모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좀 유명하다…기보다는 얼굴 식별이 가능한 까메오를 썼더라면 좋았을 듯 싶기도 하고 그렇다.
얽힌 사건 2. 야구장의 그녀
이 야구장의 그녀는 ‘얽힌 사건 3’과도 얽혀있고 동치성과 여러모로 얽혀있다.
야구장에서 실연당한 그녀의 절규로 인해 동치성은 잘나가던 투수에서 2군으로 전락한다.
치성
“야구시합에서 모든 극적인 것들은 9 회말에 벌어진다. 그리고 극적인 것을 연출 하는 것은 십중팔구 지고 있는 팀이 이기고 있는 팀에게 만들어진다.
극적인 것이 만들어지는 데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첫째 누가 미치도록 잘하거나... 둘째, 누가 미친놈마냥 못하거나.”
이 후 그녀는 그녀의 맘 변해버린 남자를 죽이고 자신도 자살한다.
약간의 호러삘이 나던 장면이었지만 어쨋거나 이 장면을 목격한 동치성에게 살아서 하는 사랑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장본인이다. 죽어서 가지는 사랑은 소용없다. 뭐 그런 메시지를 주는 인물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얽힌 사건 3. 동네 밤도둑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도둑으로서 결정적으로 이연과 치성이 동거를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치성은 집에 숨어들어온 도둑을 야구방망이로 군기를 잡아 은행에서 대출받아온 돈뭉치를 던져주어 보낸다.
그런데 이 도둑이 남기고 간 가방 안에 하필 ‘얽힌 사건 2’에서 야구장의 그녀에게 살해당한 사람의 손목 시계가 들어있던 것이었다.
그것으로 인해 치성의 집엔 형사들이 잠복하게 되고 경찰서 조사받으러 다닐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치성은 이연의 집으로 피신하는 방법을 택한다.
치성 이 새끼야. 나이도 어린 새끼가... 열심히 일해서 돈 벌 생각을 해야지...
도둑 남들 다 잘 때 이런 거 하는 것도 힘든 거에요...
영화 속 영화
이연이랑 치성이가 첫 데이트 때 본 영화가 하나의 압권이다.
정재영 오빠께서 어찌나 나레이션도 재미있게 잘하시던지.
'전봇대가 전해주는 사랑 이야기'. 단편 영화 한 편을 보는 듯한 완결된 내용이다.
다른 건 둘째치고 서로 보이지 않는 곳의 두 사람을 전봇대가 연결해준다는 그런 설정은 어릴 때 억지로 내방에 혼자 자면서 무서움을 달랠 때 하던 생각이어서 감회가 남달랐다.
나는 전봇대 보다는 전화나 라디오의 전파를 생각했는데, 전화선이 땅에 묻혀서 저 독도에 있는 사람이랑 나랑 연결해주고 라디오도 보이지 않는 주파수가 집집마다 있는 라디오 안테나와 맞닿아 있다는 그런 상상.
물론 요즘도 내가 따수운 이불 속에서 자고 있을 때도 어디선가 밤을 새며 비상근무 같은 걸 하는 사람들 노고를 생각하면서 적막으로부터 오는 두려움을 달래고 또 감사하곤 한다.
이연 & 치성
동작구 흑석동의 필기공주 한이연의 집에는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 받은 각종 경품이 뜯지도 않은 채로 쌓여있다. 그나마 이웃에게 좀 돌려주었는데도.
그녀가 치성을 처음 알게된 것은 10년도 넘어서 지금은 왜 치성을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치성이가 자주 들르는 호프집에서 의도적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던 어느 날 술 몇 잔에 취해 쓰러진 치성을 봉투에 담아 여관으로 데려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것을 빌미로 경품으로 받은 핸드폰을 치성에게 건네고 경품으로 받은 식사권과 영화표를 함께 쓰자고 제안한다.
작업 순서가 정말 척척 들어맞는다.
이연 아는 여자 많아요?
치성 네?
이연 주변에... 그냥 아는 여자.... 많아요? 몇 명이나 되요?
치성 한 명도 없어요.... 거기가 처음이네요...
이연 후...다행이네...참 다행이다...기분이 좋아지네...
이건 뭐 그리 특별한 대사는 아니지만 두 배우의 대사 톤이 너무 자연스럽고 귀에 인상적으로 남는다.
특히 이나영의 표정 연기는 정말로.
사실 대사도 특별 한 거 같다. 이 영화의 제목이 왜 ‘아는 여자’가 되었는지 나타내 주는 부분이니까.
‘아는 여자’ , ’아는 사람’
일상 속에서 흔하게 둘러대는 말인데 의미를 제대로 생각해 본 사람이 있나 모르겠다.
이 영화를 본 후 '뭐, 그냥 아는 사람이야~'라는 말을 쉽게 내뱉을 수 없을 듯 하다.
첫 데이트를 마친 후 이연네집 앞에 수그리고 앉아서 하던 대화들은 이 영화가 코믹 영화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하였다.
두 주인공의 부모님이 돌아가시던 날의 회상장면은 죽음을 다루었음에도 너무 웃겼다.
골목에 주르륵 달린 조등과 어린 두 주인공, 8통 1반 주민들 단체 여행 가던 날 비행기 사고로 동네에 줄초상이 난 것이다.
치성 아버지가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신 날 아버진 하늘로 가셨어요.
이연 비행기 타고 하늘로 가셨네요.
치성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아버진 나한테 사랑한다고 얘기해 주셨어요. 마지막까지.
이연 원래 이륙할 때 전화기 꺼야 되는데 용케 하셨네요.
치성 (버럭!) 처음 탄 거니까 잘 모르셨나 보죠.
그리고 그 다음 장면이 대박이다.
먹던 음료수캔 두 개를 양쪽 발로 꾹꾹 밟아서 신발에 장착(?) 한 후 쓰레기는 자기집 가서 버린다며 돌아서 간다.
가는 길에 코피 흘려 쓰러지지만.
영화를 보면서 단독 주택 1층에 사는 남자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이연이는 코피 흘리는 치성을 위해 보약을 다려다 주면서도 대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창문으로 건네준다. 참 로맨틱하지 않은가 -_-?
그리고 치성이는 치수를 물어보거나 안아서 재보거나 하지 않고 담벽에 분필로 이연이의 실루엣을 그려 빨간 원피스를 선물해 준다.
그 빨간 원피스를 입고 "이런 옷은 처음이라서." 라며 수줍어 하면서 빙그르르 도는 이연이도 너무 귀엽고.
선천적으로 콧 속 혈관이 약해 피로와 스트레스가 겹쳐 코피를 흘리는 줄 알았던 치성이가 알고보니 코 후비는 버릇 때문에 코피가 났다는 것을 알게 되고는
"(울먹거리며) 코 파지 마요. 안되요. 더 이상 코 파면 안되요. 큰일나요."
했던 장면도 재미있었다.
도둑이 나타났다는 찢어지는 고함 소리에도 그저 "도둑이 왔나봐여~", "그런가보네~" 하는 이들은 정말 천생 연분인 듯 하다.
투수가 타자가 친 볼을 잡아 관중석으로 던지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하던 이연이를 위해서 치성이는 실험정신을 발휘한다.
모든 사람들이 어이없어 하는 와중에 이연이만 실실 웃는다. 사랑을 확인시켜주는 방법도 참 가지가지 인 것 같다.
물론 치성이는 자신이 시한부 인생인줄 알고 그랬지만
선수 생활 접을 각오 하고 집 잡혀 빌린 돈으로 선심쓰고 했는데 오진이어서 기뻐하기는커녕 분노한다. 허무함이 컸던 모양이다.
대노한 와중에 '사랑이 뭐냐. 날 사랑하냐.'고 윽박지르자 이연이가 쭈뼛쭈뼛하며 다가가 굳이 귀속말로 "사랑해요~"라고 속삭이는 장면도 명장면이다.
나영님의 대사 톤이 정말 맘에 들었던 부분 중 또 다른 하나는 도둑을 은닉해준 일로인해(실은 장물 중에 피살자의 소지품이 있었기 때문에) 치성이네 집에 형사들이 잠복하던 그 때 “집에 가면 안돼요. 집에 가면 아저씨 잡혀가요.” <- 이거였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마치 '시네마 천국'에서 알프레도 할아버지가 토토에게 준 선물과 같은 키스 편집 장면처럼 장했던 인물들의 사랑의 정의가 나온다. 그리고 치성은 은행 강도의 말처럼 이연에게 이름을 물어보고 나이를 물어보고 혈액형을 물어보고 취미와 좋아하는 음식을 물어보면서 영화는 끝난다. 이연이는 성격좋은 B형이고 좋아하는 음식은 사발면이다.
은행 강도의 정의
사랑이 뭐 대수냐? 여자 만났다. 이름부터 물어보고, 이름 알면 그 이름을 가진 그 여자를 사랑하는 거고, 그 다음에 나이 물어보고 그 다음에 좋아하는 음식, 취미. 이렇게 질문부터 하면서. 뭐 평생 질문 하다 보면 죽을 때 아 이게 사랑이구나 하는 거죠 뭐. 질문만 평생 하다 보면 그 사람 사랑하는 거지 뭐.
밤도둑의 정의
저요. 사랑에 대해서 잘은 몰라요. 근데 사랑하면요. 그냥 사랑 아닙니까? 무슨 사랑 어떤 사랑 그런 게 어디 있나요? 그냥 사랑하면 사랑하는 거죠. 도둑이라 잘은 몰라요. 가겠습니다.
치성의 정리
사랑이란 도대체 뭘까라는 질문으로 오랜 세월을 보냈었다. 참 신기하게 그토록 궁금해 하면서도 난 한번도 국어사전에서 그 의미를 찾진 않았다. 거기에 써진 해석을 믿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기 때문 일거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난 오늘 누군가를 위해서 볼을 던졌다. 사랑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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