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2002)_'쟤 저러다가 한 번 크게 혼나지' 싶은 팽팽한 긴장,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던 조손관계 ── 영화

2002. 5. 1. 허리우드극장

이 영화는 내가 본 역대 한국 영화들 중에 아마도 '최고', '최상'으로 랭크되는 작품일 거다.
'천국의 아이들'과 비슷한 여운을 주는데 내가 한국사람이어서인지 이 영화에 좀 더 정이 간다.
그리고 유승호...내가 좋아하는 소지섭 닮은 유승호. 승호가 좀 더 잘생겼, 아니 예쁘게 생기긴 했다 ㅋㅋ
어쩜 이정향 감독님의 혜안이란 ㅋㅋ
이 감독님은 많은 작품을 하시는 편은 아니지만 들고 나오는 작품마다 실망을 주지 않는다.
심은하, 송혜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현존하는 한국의 여배우들이기도 하고.
최근에 본 <오늘>이라는 작품이 메시지 전달 방식이 너무 직접적이라서 살짝 실망을 했다면
그에 비해 <집으로>는 정말 나무랄 곳 없는 영화다운 영화였다. 장르의 특성도 잘 살아있지만 시나리오나 사회적 메시지까지 모두 놓치지 않았다.
 
상호라는 미운 일곱 살 남자아이가 있다.
어느날 상호는 어떤 이유인지 모르게 형편이 어려워진 엄마 손에 이끌려 시골 외할머니 집에 맡겨진다.
도시 아이인 상호에게 시골은 답답하기만 한 곳이다. 재미있는 놀거리도, 입맛에 맞는 먹을거리도 없고 온 세상이 멈춘 듯 시간은 느릿느릿 지루하게 간다. 귀도 어둡고 말씀도 못하시고 게다가 글도 못읽으시는 할머니와는 대화도 잘 안통하고 게임기에만 의존해서 하루하루 연명(?)한다.

영화 한 두 번 본 것이 아닌 나이기에 이 소년이 이러니저러니 해도 시간이 지나면 시골생활에 익숙해질 것이라고 당연히 예측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상호라는 미운 일곱 살 개구장이 소년은 저~얼대로 변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 비뚤어짐.
77세나 되는 연로하신 할머니가 안쓰러워보일만도 한데 아주 지긋지긋하게 반항(?)을 일삼는다. 상호가 일으키는 말썽은 비록 어린아이지만 '이런 불효막심한 녀석같으니'이라는 욕이 나올 지경인데.... 
'쟤 저러다가 어느 순간 할머니의 화를 일으켜 한 번 된 통 혼날거야' 라며 나도 모르게 통쾌한 장면을 기다리고 기다리게 되었지만 끝내 그런 장면은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형편이 나아지면 데리러 오겠다는 엄마가 정말로 돌아왔을 때 할머니와의 이별 때문에 서러운 눈물이 절로 주룩주룩 흐를만큼 어느 새 달라져 있던 상호.

배우가 아닌 김을분 할머니. 젊어서는 곱상했을 것 같은 얼굴의 인자한 생불같은 이 할머니의 캐릭터는 많은 생각을 안겨준다.
나야 시골생활을 해본 적도 없고 할머니 손에 양육이 맡겨진 적도 없지만 어렴풋이 느껴지는 할머니, 그 중에서도 외할머니 특유의 정서는 마음을 한 켠을 따뜻하게 하면서도 서글프게 한다. 그야말로 웃프다.
딸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 아이를 맡기고 가도, 그 아이가 자기를 무시하고 갖은 수를 써서 괴롭혀도(?) 회초리 한번을 들지 않고 그저 너그러운 부처님 미소를 보이는 할머니의 모습.
좀처럼 화를 내시는 모습을 볼 수 없었던, 조금이라도 자식에게 폐가 되지 않으려 연로하신 몸을 한 시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움직이시던, 그토록 지혜롭고 영특하면서도 배우지 못해 글은 읽지 못하셨던 우리 외할머니와도 닮아서.
내가 상호처럼 외할머니 속을 썩일 일이 없었던 것이 참 다행이다 싶었음 ^^;

이 영화는 시대를 반 걸음 정도 앞서 간 것 같다.
요즘은 이혼율도 높고 그에 따른 가정 해체도 빈번해서 조손가정이 더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 물론 할머니집이라고 해서 꼭 이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깡촌은 아니고 자장면 한 그릇 사는데도 돈을 탈탈 털어야 할만큼 가난한 건 아닐테지만, 아이에게 좀 더 익숙한 도시에 부자라고 해서 속편한 것만은 아닐 거다.
고부갈등 같은 걸로 자식 부부에게 직접적인 이혼사유를 일으킨 것도 아닌데 어느 날 갑자기 자식이 찾아와 사정이 생겼다며 제 자식을 맡기고 가버리면 얼마나 황당하고 또 슬플까. 자식의 삶이 기대한 만큼 순탄하게 흘러가는 것이 아닌 모양이라고 한탄을 하면서도 세상 모두가 손가락질을 하더라도 자신만은 자식 편에서 힘이 되어줘야 한다는 일념으로 힘듦을 내색조차 하지 않는 부모의 심정. 더 잘해주지 못해서라고 생각하기 때문인지, 사회에서 더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든든한 배경이 못되어 줘서라고 생각하기 때문인지 그저 미안하다고 자식에게도 굽신굽신하는 늙은 부모의 심정.
젊어서 자식 뒷바라지에 힘들었을텐데 늙고 힘들어져서도 또 그 자식의 자식을 돌보아야 한다면? 나라면 미치고 팔짝 뛰고도 남을 것 같다. 
그래서 이 영화는 서글펐나보다.
나라면 미치고 팔짝 뛸 그런 폭탄같은 상황을 우리의 부모님 세대들에게는 아주 당연히 고분고분 받아들일만한 것일거라고 생각하며 떠넘기는 나쁜 자식이 되지 않을까 스스로 움찔움찔 찔리고 있는 거지.
내가 그런 박복하고 무능력하고 안하무인인 사람이 될까봐 서글프고 겁이 났나보다. 

영화의 분위기는 솜사탕 같다. 한없이 순수하고 파스텔톤으로 밝고 가볍다.
생각해보면 상호와 외할머니의 에피소드는 왠만한 개그시리즈보다 재미있는 것이었다. 최불암 시리즈나 만득이 시리즈보다 더 웃김.
어떻게 이런 소소한 에피소드들을 생각해낼 수가 있는 건지 시나리오를 쓰신 이정향 작가님이 존경스럽다.

그렇더라도 상호의 미래를 생각하면 서글프고, 시골집에서 홀로 보낼 할머니의 남아있는 생애를 생각하면 또 서글픔이 생기고...뭐 그럼.
또 아주 가끔은 지금처럼 바람직하게 성장한 유승호보다 <집으로> 시절의 꼬마 유승호가 그립기도 하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여운을 남기는 좋은 영화다.








덧글

  • TORY 2014/09/18 19:00 # 답글

    처음에 상호 맡기러 왔을 때 상호 엄마 간다니까 할머니가 자고가라고 손짓 몸짓 하신 순간부터 폭풍눈물;;
    정말 웃프다는 표현이 딱인 것 같아요, 보는 내내 정말 엉엉 울었던 영화에요. 또 보고 싶네요
  • 착한마녀 2014/09/19 17:15 #

    상호 엄마도 참...어떻게 친정엄마에게 왔으면서 ㅠㅠ
    하지만 친정집에서 하룻밤 머물고 싶은 본능을 이길만큼 서둘러 돌아가야만하는 사연이 있을 거 같아서 더욱 갑갑했어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하면서도 알고보면 모든 것이 서글픈 그런 영화네요, 하지만 보는 동안 만큼은 '고 녀석 참...'하면서 즐겁게 볼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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